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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story/faithful

마음의 눈을 열어라!!

창세기 3:6~7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누가복음 24:30~31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창세기와 누가복음에서 둘다 "눈이 밝아져" 라는 표현이 나온다.
창세기 말씀을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든 후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라고 강력히 먹지 말라는 경고를 하셨다. 그런데 하와는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선악과를 먹게 된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게 됨으로 '눈이 밝아지게' 된다.
누가복음 말씀을 정리해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부활 사건 이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고 그들과 동행하게 된다. 그 두 제자의 대화 내용은 십자가 부활사건이었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자신들이 동행하는 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축사하시며, 그들에게 떼어주었을 대 그들은 '눈이 밝아져' 그들과 동행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인줄 알게 된다.

이 두 말씀은 아주 동일하게 '그들의 눈이 밝아져'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런데 그 의미는 전혀 반대이다. 창세기에서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자신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누가복음에서의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예수님을 보게됨을 의미한다.

이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인간의 타락 전과 후의 우리 인간의 상태를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타락전 본질상 우리는 목적한 바를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의존자' 였다. 타락 전 우리는 자기의식보단 하나님의 의식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보는 관점이 하나님의 관점이었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에 땅을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타락 이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를 우리는 '자존자'라고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에 의하면 하나님께선 피조세계를 만드시고 '심히 좋았더라'라고 말씀하셨다. '심히 좋았더라'는 하나님의 관점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락 전 우리는 '심히 좋은 세상'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좋았다고 말씀하신 그 본질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피조세계의 본질을 볼 수 있는 존재가 우리였다. 창2:25_"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은 처음 상태는 벌거벗은 상태였고, 그런 상황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즉, 상황을 본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본질을 본다는 것은 서로를 '사랑의 눈'으로 바라봄을 의미한다. 하지만, 선악과를 먹음으로 눈이 밝아졌다. 눈이 밝아졌다는 것은 육체의 눈이 떠진 것을 의미한다. 피조세계의 본질이 아닌 피조세계의 환경에 따르는 자, 피조세계를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피조세계의 지배를 받는 자로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에게 수치심, 낮은 자존감, 부끄러움 등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들은 본래 주어진 것들이 아니라 선악과를 통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은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결국 본질을 보는 능력은 상실했다. 현재 우리는 피조세계를 보고 이해할 뿐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다. 즉, 환경에 묶여 사는 존재로 전략해 버린 것이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눈이 밝아짐'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통해 영의 눈이 열려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게 된 사건이다. 이것은 현실의 눈으로는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지만, 그리스도가 그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이 자신이 눈이 아닌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그들이 함께 동행한 자가 예수그리스도시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즉, 자신의 능력으로 보는 현실의 눈이 닫히고, 하나님의 영으로 보는 본질의 눈이 떠졌음을 의미한다.


열왕기하 6:15~17
15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이 일찍이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읍을 에워쌌는지라 그의 사환이 엘리사에게 말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하니 
16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17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왕하 내용을 잠깐 정리해 보면, 아람왕이 이스라엘의 선지자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많은 군사를 동원해 엘리사가 있는 성읍을 둘렀다. 엘리사의 사환이 이 장면을 보고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라고 엘리사에게 고한다. 이 때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되었고, 그 때 그 사환은 하늘의 군대가 엘리사와 함께 함을 보게 된다. 사환이 바라봤던 것은 적으로 둘러쌓여 있는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즉, 현실의 모습을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사환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는 현실의 아니라, 현실의 본질을 보게 된 것이다. 현실의 영향은 적군만 보게 되지만, 그 본질을 본다면 하나님의 군대를 바라보게 된다.

에베소서 6:5~9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7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9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우리가 마음의 눈(영의 눈)이 뜨지 않는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표현하는 눈가림이다. 눈가림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행동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봐야 할 관점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주께 하듯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의 눈이 열릴 때만이 이땅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요한복음 20:25~29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에서는 도마가 나온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엔 믿지 않았다. 그가 말하길 "내가 그의  손에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못 자국에 넣어보고, 내 손을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으면 믿지 않겠다"라고 했다. 그는 보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그렇게 8일이 지난 후 예수님께선 도마에게 나타나시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라고 말씀하신다. 이 때 도마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부활의 사건을 믿게 된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선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기 때문에 믿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믿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본다는 것은 학습에 의한 것이다. 우리 뇌의 작용이다. 그리고 자극에 대한 반응일 뿐이다. 우리 뇌가 잘못 이해하고, 잘못 판단한다면 그 감각은 거짓된 감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과연 진실일까? 우리가 느끼는 현실은 뇌에 자극에 의한 판단이다. 우리는 어쩌면 가짜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학습에 의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3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성경에는 분명히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고 나와 있다. 지금 우리보는 것(정확한 표현으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은 인간의 사고체계로 볼 수 없는 말씀으로 지어진 것이다. 인간의 사고체계로 본다는 것은 인간의 감각의 반응인 시각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직 우리가 세계의 가장 근본인 말씀을 보기 위해선 우리의 감각이 아닌 영의 감각이 떠야만 한다. 오직 영의 눈이 떠져야지만, 그 말씀(본질)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으로 세상을 봐야 한다. 하나님의 영의 눈으로 보지 않는 것은 자기의 사고체계로 보는 것이고, 본래 실제를 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자아의 문제이다. 이것은 세상에 묶여 사는 것이지,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요한복음 9:39~41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40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보지 못하는 자들을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을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때 한 바리새인이 "우리도 맹인인가?" 라고 말할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라고 명확히 말씀하신다.
바리세인이 "본다고 하니" 죄가 그대로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영적인 눈(영안)을 의미한다. 바리새인은 이미 육적인 눈이 떠진 상태이다. 이것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 눈이 밝아짐을 의미한다. 그들이 떠진 육적인 눈으로 인해 그들은 영적인 눈은 닫혔다. 이것을 그들이 본질을 보지 못함을 의미한다.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이 대화가 이어지기 전 예수님께선 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 
요한복음 9:1~11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 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 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예수님께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다. 예수님께선 맹인의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신 후 맹인에게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이 맹인은 가서 씻게 됨으로 보게 된다. 맹인의 고백에 중요한 핵심이 들어있다.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이것은 맹인은 믿음으로 행함을 의미한다. 만일 맹인이 자신의 눈이 떠질 것이라 믿지 않아 가서 씻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면 그는 눈을 뜰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 믿음은 본질이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본질을 그는 믿었기 때문에 그는 눈을 뜰 수 있었다. 그가 행했다는 것은 그의 영적인 눈이 떠졌음을 의미한다. 맹인은 육적인 눈이 닫혀져 있었다. 그런데 그는 육적인 눈보다 그리스도를 통해 영적인 눈을 먼저 뜨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육적인 눈 마저 떠진 것이다. 우리가 영적이 눈이 떠진 다는 것은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된다는 것이고, 믿음의 행위를 통해 우리는 본질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적용.
구원이란 ①자아의 죽음을 의미하고, ②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옴을 의미하고, ③우리의 본질이 바뀌었음을 의미하고, ④우리의 보는 사고체계가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1) 편견을 버려라!
사고체계의 의한 주관적 해석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께서 날 인도하실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면 이것은 우리 자아의 사고체계에 의해 나온 결과이다. 하나님께선 분명이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의 사고체계가 본질이 아니라, 영안에 있는 그 생명!! 이 본질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육에 혼을 소유한 영적인 존재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들어옴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스스로의 편견을 버려야 한다. 하나니믜 생명이 본래 우리의 모습이다. 편견은 우리의 사고체계, 자아의 결과이다. 우리의 자아 마저도 버려야 한다.

2)성령 안에서 주의 말씀에 따라 기도하라!
성령 안에서 주의 말씀에 따라 보는 것은 실제가 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53:5)"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17:23)"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17:4)"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11: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말씀의 눈으로 봐야 한다. 느낌, 상황을 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말씀에 근거해 이미 해결되었음을 보는 것이다. 치유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말씀에 근거해서 이미 치유되었음을 보는 것이다. 우리가 고민하고 있다면, 그 고민 역시 하나님께서 이미 해결해 주셨음을 바라보는 것이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고자 하는 계획이 있다면 그 계획들이 이미 이뤄졌음을 바라봐야 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들의 실제로 이뤄지게 한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행하고, 이뤄질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 할 것이다. 그 때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립보서 4:19)" 우리는 문제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말씀을 통해 기도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한다는 그것은 말 그대로 '긍정의 힘'이다. '긍정의 힘'은 자신을 위함이며 자신의 능력이다. 하나님의 위함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나 자신이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고, 그것은 하나님을 위함이다. "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이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관점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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